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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열전 21] 현상금 138억 원의 사나이(下)

전쟁이 발발하자 외무부는 귀국령을 내렸다. 영국 영향력이 큰 부쉐르에 잔류하는 데 따른 위험성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은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사이에 있고 오스만제국에 가까운 페르시아로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이동 배치했다.

반면 독일은 병력을 페르시아로 배치할 여력이 없었다. 안위를 우려해 귀국령을 내린 외교부의 지시를 바스무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지형이 험한 산악지대로 피신해 영국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하겠다고 보고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투르크 기병대 ⓒ위키피디아 제공

전쟁 발발로 정신이 없던 외교부로서는 바스무스의 이런 결정에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잔류 결정은 곧 예상치 않았던 성과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바스무스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 "이슬람 성지 모독하는 영국을 축출하라"…흑색선전에 영국 식민당국 당혹

도피 과정에서 바스무스는 거액의 독일 금화를 챙겼다. 현재 가치로는 30억 원이 넘는 금화였다. 자신과 뜻을 같이한 부하 직원과 함께 그는 산악지역으로 숨어들어 현지인 규합에 착수했다.

그는 우선 남부 지역의 대표적인 유목부족인 탕시르족과 콰시하이족 포섭공작에 나섰다. 유목민 차림에 이슬람 교리에 밝고 현지어가 유창한 바스무스에 부족장들은 환심을 보였지만 의심은 거두지 않았다.

부족장 포섭공작에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역시 금화였다. 예상하지 않았던 거액의 금화를 챙긴 부족장들은 기꺼이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영국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지휘하던 시절의 바스무스 ⓒ위키피디아 제공

이들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바스무스는 주민들이 가장 빈번하게 이용하는 시장을 중심으로 영국에 대한 흑색선전에 나섰다. 우선 영국의 대(對)중동정책이 얼마나 비열한지를 주장하고 이를 분쇄하려면 무장항거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시장을 대거 살포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대대적인 분노를 촉발한 것은 반(反) 이슬람 소문이었다. 바스무스는 빠르게 전국적으로 구성한 연락망(일명 '만개의 눈')을 통해 영국이 예루살렘 등 이슬람 성지를 모독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전국 곳곳에서 영국에 반기를 든 봉기가 잇따랐다.

이 소문에 자극을 받은 사람 가운데에는 젊은 이슬람 신학생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도 있었다. 호메이니는 훗날 부패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최고지도자로 부상, 미국을 상대로 외로운 '성전'을 벌인 인물이기도 하다.

◇ 신처럼 추앙받는 '뚱보 독일인'…임무 위해 정략결혼도

바스무스의 활동은 멀리 아프가니스탄까지 이어졌다. 여러 곳을 부지런히 오가면서 그는 영국에 대한 무장봉기를 부추겼다. 불과 1년 만에 그는 영국 당국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진상 조사에 나선 영국은 처음에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말도 제대로 타지 못하는 뚱보가 현지인들 사이에 신처럼 추앙받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피나는 노력을 통해 현지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이슬람 등 현지 종교와 문화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경계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스무스는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려고 영향력이 큰 현지 군벌 딸과의 정략결혼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이 결혼식에는 수천 명이 초대될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초대된 하객들 대부분은 '만개의 눈' 소속인 비밀조직원들이었다.

인도까지 방대한 정보망을 가진 이 조직을 통해 바스무스는 영국군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파악해 보고하는 한편 방해공작을 끊임없이 수행했다.

◇ 영국, 잇따른 체포 실패 후 거액 현상금…'전설'의 퇴장

영국은 바스무스의 체포와 조직망 와해에 부심했다. 군을 동원해 체포에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거미줄처럼 깔아놓은 정보망 덕택에 바스무스는 사전에 체포망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주 과정에서 큰 실수를 했다. 바로 독일 외교관들에게 지급된 암호 책을 분실한 것이다. 이 암호 책은 결국 영국 해군 정보부 산하 암호해독반 수중에 들어갔다. 암호책 분실에도 바스무스는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이미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그것에 더이상 연연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스무스 체포에 실패한 영국은 하는 수없이 50만 달러라는 유달리 큰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 현상금을 비웃기라도 한듯 바스무스는 체포되지 않았다.

▲바스무스의 활동을 다룬 단행권 ⓒ위키피디아 제공

그러나 그의 신출귀몰한 활동에도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1917년 초에 들어서면서 전세가 독일에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족장들과 군벌들은 고민에 빠졌다. 바스무스의 호언장담과 달리 독일이 영국을 물리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그들은 영국에 기대는 것이 현실적으로 낫다는 분위기였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바스무스를 통해 공급되는 금이 줄어들자 이들의 자세는 종래와는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바스무스는 이에 맞서 독일의 빌헬름 황제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헛소문을 내는 등 와해 방지에 최선을 다했지만, 대세를 돌릴 수는 없었다.

바스마스는 영국이 10만 명의 대병력과 전함까지 파견해 비밀조직 와해에 나선 1918년 초 터키로 도주했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에 대한 체포작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바스무스는 터키에서 영국 당국에 체포돼 수감됐다. 2년 남짓한 수감 끝에 출옥한 바스무스는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부쉐르로 돌아갔다. 농장을 운영하면서 수익금이 나면 자신을 도와준 현지 조력자들에게 돌려줄 구상은 지인들과의 돈 문제로 실패로 끝났다.

빈털터리로 1931년 4월 귀국한 바스무스는 7개월 후 세상을 등졌다. 그의 마지막은 초라했다. 한때 자신을 추앙하던 수천 명의 페르시아인이 아닌 가난, 외로움 그리고 망각만이 그의 임종을 지켰다. 전설의 퇴장인 셈이었다.

<참고문헌>

*Ernest Volkmannn, Spies: The Secret Agents Who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1994)

(서울=연합뉴스) 김선한 기자

연합뉴스  sh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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