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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열전 21] 현상금 138억 원의 사나이(上)

한 개인에게 붙은 현상금이 100억 원이 넘는다는 소리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 가장 먼저 수배자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렇게 큰 현상금이 붙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정확히 100년 전인 1916년 영국은 한 독일인에게 유례가 없는 50만 달러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영국 정부는 그를 생포해 데려오거나 사체를 가져와도 이 현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다만 수배자라는 사실만 확인하면 된다는 단서와 함께.

당시의 50만 달러는 28일 현재로 환산하면 138억6천만 원을 웃돈다. 지금도 엄청난 액수인 이런 현상금을 100년 전에 붙게 한 당사자는 빌헬름 바스무스라는 독일 외교관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강력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한 것 때문에 이런 거액의 현상금이 붙게 됐다.

◇ '아라비아의 로런스' Vs '페르시아의 로런스'

데이비드 린 감독이 연출한 '아라비아의 로런스'는 제작된 지 5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상영되는 영화다. 영국군 정보장교로 아랍 민족 독립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T. E 로런스의 자서전 '지혜의 일곱 기둥'(The Seven Pillars of Wisdom)을 토대로 제작된 이 영화는 피터 오툴, 앤서니 퀸, 잭 호킨스, 오마 샤리프 등 명배우들을 출현한 명작이다.

어니스트 볼크먼 등 첩보사를 연구해온 전문가들은 바스무스를 '독일의 로런스,' '페르시아의 바스무스' 등으로 부른다. 라이벌인 로런스를 빗댄 이 말의 이면에는 바스무스의 활약상 역시 로런스에 못지않다는 평가가 담겨 있다.

실제로 바스무스는 심리전, 게릴라전, 기만전 등에서 탁월한 실적을 거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바스무스는 지금의 이란인 페르시아 등을 무대로 현지인들을 규합, 영국군을 여러 차례 궁지에 내몰아 현대사의 물줄기를 뒤바꿀 수 있었던 인물이다.

만약 그의 노력으로 독일이 당시 중립국이던 페르시아에서 원유 채굴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면 경쟁국이던 영국은 강대국 대열에서 탈락,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수 있었다.

▲중동에서 스파이로 맹활약하던 시절의 빌헬름 바스무스 ⓒ위키피디아 제공

◇ 스파이와는 거리가 먼 풍운아…직업 외교관길 선택

스파이 영화의 대명사인 '007'의 영향 탓인지 남성 스파이라면 잘생긴 얼굴에 멋진 체구가 먼저 연상된다. 그러나 바스무스는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인물이다.

키가 작고 뚱뚱하고 대머리인 데다 둥근 얼굴에 눈은 찢어졌다. 더구나 첩보활동에 필요한 체계적인 훈련과 교육은 받은 적도 없었다.

바스무스는 1880년 독일 북부 니더작센주의 중심지인 하노버 인근에서 태어났다. 대학 졸업한 후 그는 1906년 외무부에 들어가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첫 해외 근무지는 아프리카 남동쪽 인도양에 있는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였다.

총영사관에서 성실하게 근무한 덕택에 바스무스는 얼마 되지 않아 부영사로 승진했다. 승진과 함께 그는 다시 페르시아의 부쉐르 주재 독일영사관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1909년이었다.

▲군복 차림의 바스무스 ⓒ위키피디아 제공

◇ 원유 채굴권을 확보하라…스파이 입문

외무부가 페르시아만 남동쪽 항구 도시로 전략요충지인 부쉐르로 바스무스를 전출시킨 것은 석유 때문이었다. 당시 페르시아는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영국이 각각 지배하고 있었다. 중부 지역만 허울 좋은 페르시아왕국 영향권 하였다.

왕국의 영향권에 든 지역이라고 해도 수도 테헤란과 그 인근 외곽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여러 부족장의 수중이었다.

독일은 영국과 엄청난 매장량을 가진 페르시아의 석유 채굴권을 놓고 치열한 물밑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경제성장을 통한 국가 발전에 석유는 불가피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석유 자원 확보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1900년대 초 이란에서 원유 채굴 광경 ⓒ위키피디아 제공

부쉐르에서 1년가량 근무한 바스무스는 이듬해 다시 마다가스카르 총영사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비자 업무 등 외교관으로서 필요한 근무 대신 사막 지형과 유목민들에 대한 연구 그리고 페르시아어 등 공부에 집중했다. 이는 훗날 그가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스파이활동을 하는데 요긴했다.

◇ 유목민을 포섭해 게릴라전을 개시하라…본격적인 스파이활동

마다가스카르에서 '열공' 이 끝나갈 무렵인 1913년 바스무스는 다시 부쉐르 재부임 지시를 받았다. 또 부임 직전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외교부 상사들과의 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도 내려왔다.

이 회의에서 바스무스에게 '특명'이 하달됐다. 페르시아의 여러 부족을 규합, 영국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개시하라는 명령이었다. 외교부는 원활한 공작 진행을 위해 바스무스에게 다량의 금을 제공했다. 인기가 없는 화폐보다는 환금성이 큰 금을 가지고 부족장들을 포섭하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판단에서다.

영국도 군벌들과 부족장 포섭공작에 열심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스무스는 자신의 임무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동시에 독일과 영국 사이에 전운이 빠르게 감돌기 시작했다. 부쉐르에 재부임한 지 1년 후인 1914년 마침내 세계대전이 터졌다. 바로 1차 세계대전이었다.

(서울=연합뉴스) 김선한 기자

연합뉴스  sh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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