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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우 변호사]하야(下野)와 헌법(憲法)

요즘 들어 한국정치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아 걱정이 된다.

혁명(革命)이냐, 정변(政變)이냐, 그리고 혼란 끝의 패망(敗亡)인가. 여러 불안한 시나리오들이 자꾸 떠올라 잠이 잘 안 온다.

한국의 언론(言論)은, 마치 챔피언이 가드를 내린 틈에 도전자(挑戰者)가 잽싸게 파고들어 어퍼를 쳐 챔피언을 한방에 그로기를 시킨 뒤, 계속 잽과 난타를 날려 케이오(KO) 직전으로 몰고 간 흥미진진한 권투경기를 생중계하는 아나운서처럼 흥분하고 있다.

청중(聽衆)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다. 도전자(挑戰者)의 팬들은 승리의 환호성(歡呼聲)을 지르고 있고, 챔피언의 팬들은 챔피언의 실수가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른다.

그도 저도 아닌 팬들은 챔피언에게 무슨 사고가 생길까봐 불안과 걱정이다.

보다못한 원로(元老) 관중이 청중석에서 걸어 나와 그로기 상태에서 로프에 기대 숨을 헐떡이는 챔피언에게 더 맞지 말고 타월을 던지는 게 목숨을 살리는 길이라고 우정(友情)(?) 어린 말투로 권유(勸誘)한다.

그러나 챔피언은 타임 종료의 휘슬이 불기까지 남은 30초를 버티려고 안간힘을 다 쓴다.

그런데, 중계방송하는 아나운서는 타임 종료 30초를 버텨보려는 챔피언의 스포츠맨 정신을 칭찬하는 게 아니라 경기가 사실상 다 끝났는데, 타월을 안 던지고 버틴다고 비아냥조로 나무란다.

챔피언이 외국 선수이고 도전자가 한국 선수일 때 애국심에 불탄 한국 아나운서가 흔히 하는 그런 일방적인 중계방송이다.

글쎄나, 국민이 4년 전에 임기 5년을 주기로 약속하고 뽑은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 했다고 이렇게 협박과 데모로 중도에 하야시키는 것은 일종의 정변(政變) 아닌가? 죄가 아니라도 이게 과연 공정한 정치게임일까?

신문의 칼럼리스트, 교수, 변호사단체 등 사회 지도층들 모두가 이 잔인하고 이상한 정치 게임을 보면서 최순실 게이트가 너무 커 하야가 당연하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민주정치가 재도약할 것이라고 오히려 기대감에 가득한 관전평을 할 뿐, 대통령의 하야가 헌법상 무슨 의미가 있는지 깊이 분석하는 사람은 없다.

하야(下野)는 대통령이 임기 전에 물러나는 헌정비상사태(憲政非常事態)이다.

우리나라는 1960년 이승만(李承晩) 초대 대통령이 부정선거에 따른 항의 시위에 밀려 하야(下野)하고 하와이로 망명(亡命)한 역사(歷史)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4·19 혁명이라 부른다. 4·19 혁명은 그 뒤 5·16 군사쿠데타로 이어졌다. 

왕제(王制)에서 왕(王)이 시위대에 밀려 퇴위(退位)하면 흔히 대규모의 유혈혁명(流血革命)으로 이어진다. 대통령보고 임기(任期) 전에 사퇴(辭退)하라고 단순히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의사표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장을 넘어 더 나아가 만일 대통령이 말을 듣지 않으면 쳐들어가서 ‘끌어낸다’, ‘탄핵한다’, ‘교도소 보낸다’고 협박하여 관철하는 건 단순한 정치적 주장이나 의사표시와는 차원이 다르다.

국가적으로는 정변(政變), 소요(騷擾), 내란(內亂)이다 (만일 박 대통령이 언론과 시위대의 협박에 굴복하여 하야(下野)하면 그 날로 우리나라 언론(言論)은 민중(民衆), 무혈혁명(無血革命)이 성공했다고 대서특필(大書特筆)할 거고 국제 언론은 ‘한국에서 중동의 봄과 같은 언론 민중혁명이 일어났다’고 쓸 거 아닌가)

개인으로 보면 대통령에게 하야(下野)라는 건 자결(自決)하라는 거와 같다. 그런 국가적·개인적·중대사(重大事)를 벌이려면, 정당하고 확실한 논거(論據)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야(下野)를 요구하는 논거(論據)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궁금해서 열심히 신문을 읽었지만 정확히 논거를 대는 사람을 못 보았다. 그냥 최순실 게이트가 어마어마한 잘못이라 국민의 실망이 너무 크니까 대통령이 책임지고 즉시 물러나는 게 옳다는 거다. 

변호사단체의 성명이라는 것도 오십보(五十步)  백보(百步)다. 전혀 헌법 논리(憲法 論理)가 없다. ‘실정(失政)-국민(國民)의 의 실망(失望)’이 헌법상의 대통령 퇴임사유(退任事由) 인가? 대통령의 측근(側近)들이 정치에 관여하고 이권(利權)을 챙긴 게 과연 최순실 하나뿐인가? 최순실 게이트는 이 나라 역사에 처음 있는 스캔들인가?

김영삼 대통령 때는 아들 현철 씨가 수많은 이권(利權)에 개입해서 거액을 챙기지 않았나. 김대중 대통령 때는 아들들과 공신들이 정부 요직의 인사에 개입하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여 돈을 챙기지 않았나. 노무현 대통령 때는 형(兄)이 정부인사에 개입하고 돈을 먹지 않았나. 이명박 대통령 때도 형(兄)이 정부인사에 개입했고 돈도 먹지 않았나. 노무현 대통령 때는....?

그런데 이 중 어느 대통령도 그런 스캔들 때문에 중간에 자진해서 물러나거나 하야(下野) 요구당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유독(唯獨) 이번 최순실 게이트에 있어서만 박근혜 대통령이 측근의 비리(非理), 농단(壟斷)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모든 언론매체가, 모든 시민단체, 더 나아가 대통령과 십수년간 당을 같이 하며 정치를 했다는 상당수의 여당(與黨) 국회의원들까지 나서 헌법이 정한 5년 임기(任期)에 관계없이 무조건 ‘즉시 물러나라’, 아니면 ‘탄핵(彈劾)한다’고 겁박(劫迫)하는가?

대통령이 남편도, 친구도, 동지도 없는 외로운 여성이기 때문인가?

심지어 과반수의 야당(野黨) 대표(代表)들이 대통령이 하야(下野)하지 않으면 청와대에 쳐들어가 끌어내리라고 소리쳐도 언론과 여당은 입도 벙긋 안 한다(안하나, 못하나). 헌법(憲法)이 바뀌었나? 헌법(憲法)의 5년 임기 규정을 무시하고 새 대통령을 하루 빨리 뽑아야 할 그런 긴박하고 급박한 국가비상(國家非常) 위기사태(危機事態)인가?

선의로 해석하면 어차피 대통령이 자진해서 물러나지 않으면 최순실 게이트의 공범(共犯)(?)으로 국회에서 탄핵(彈劾)이 결의(決議)되어 직무(職務)가 정지(停止)되고, 헌법재판소에서 유죄판결이 나서 빠르면 6개월 뒤에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고 그 뒤엔 최순실의 공범(共犯)으로 교도소(矯導所)에 갈 것이 100% 확실(?)하니까 공연히 소란 떨지 말고 빨리 그만두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지 않느냐는 다분히 한국적인 회유성(懷柔性) 협박(脅迫) 같다.

정말 그렇다면, 이제 우리나라는 1987년부터 애써 키워온 헌법민주주의가 끝나고 언론과 시위, 원로회의로 대통령의 진퇴(進退)를 결정(決定)하는 한국식(韓國式) 언론 인민민주주의가 시작되나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 시 언론과 홍위대(紅衛隊)가 국가주석(國家主席) 유소기(劉少奇)를 강제(强制)로 하야(下野)시키고 중국식 인민 대중민주주의를 10년간 실험한 적 있다]?


헌법이 정한 대통령 임기가 보장받지 못한다면 국회의원, 회사 임원(任員), 공무원, 교수도 다 마찬가지가 될 거다. 국회의원도 임기 중에 의정활동(議政活動)을 잘못하면 선거민이 시위로 끌어내고, 회사 임원도 실적이 나쁘면 노조 데모로 물러나고, 교수들도 실력 없으면 학생회가 결의하여 물러나고…. 민주주의도 좋고, 언론자유도 좋지만 법치주의(法治主義)의 바탕이 무너지면 모든 게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우리나라가 지난 29년간 지켜온 자랑스러운 1987년 헌정체제(憲政體制)를 뒤집고 50년 전 중국이 실험하여 실패한 언론 대중민주주의 체제로 후퇴하려 하는지. 제발, 차분히 돌아가 숙연한 마음으로 1987년의 헌법(憲法) 제70조를 다시 읽어보자.

“대통령(大統領)의 임기(任期)는 5년(年)으로 하며 중임(重任)할 수 없다.”

그리고 이 5년 단임제(單任制)가 지난 29년간 한국의 정치 안정(安定)과 민주주의를 지켜온 보루(堡壘)였음을 상기(想起)하자.

김평우

미국 변호사, 제45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2012년부터 UCLA 비지팅스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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