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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삼경, 그대가 교리교황인가?교황은 신의 대변자이고, 신의 권능이고, 신의 의지와 요구를 알고 있다고 착각

예장통합 이대위 위원장 임준식 목사는 100회 총회석상에서 98회 총회에서 최삼경목사가 자신을 불러 "자신이 아니면 누구든지 이단으로 해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러면서 임목사는 "최목사는 총회 위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가 교단에서 이단해지 되었을 때도 최삼경은 "교단은 이단을 해지하였을지 모르지만 자신은 해지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하였다. 교리적 교황이다. 당시 교황에 대해 루터와 칼빈은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지금은 교황 수준으로 등극한 이단감별사들에 대해 종교개혁이 필요할 때 이다. 그들이 교황느릇을 하기 때문이다.
 
1. 종교개혁

루터와 칼빈에 의해 주도된 종교개혁은 교황청의 타락을 겨냥한 것이었다. 교황청은 타락했었는가? 확실히 그랬다. 면죄부와 성직의 판매가 일반적이었다. 교황청은 스스럼없이 세속 국가가 되어 갔다. 거기에 성스러움과 신앙은 없었다. 어떻게 타락이 가능했는가? 이것은 중요한 주제이다. 만약 로마 카톨릭이 진정한 신앙이었다면 타락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은 타락할 수 없다. 단지 신앙을 빌미로 삼는 사람만이 타락한다.

교황은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지상 세계에서의 신의 대변자였으며 신의 권능이었다. 그는 신의 의지와 요구와 분노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영향력은 “신에 대한 앎”에 기초하고 있었다. 즉 지식으로서의 신앙이 로마 카톨릭의 주된 교의이다. 교황은 얼마든지 신을 빙자할 수 있었고 어디에든지 신의 의지를 개입시켰다. 단순히 자기 이익을 위해.

이단감별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신의 대변자이고, 신의 권능이고, 신의 의지와 요구를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행위는 신에 대한 앎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신봉하는 교리와 다르면 모두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이다.
 
루터와 칼빈에게 있어서 신은 지식에 의해 이해될 수 없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종교개혁의 이념은 간단하다. 우리는 신의 의지에 대해 모른다. 거기에 신앙은 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다. 우리는 믿음만으로 그에게 다가가려 노력해야 한다. 교리로 구원을 얻기보다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루터가 말하는 “오직 믿음 (sola fide)"이다.
 
2. 정통과 이단

현재 이단감별사들은 자신들의 교리나 신앙기준이 다르면 누구든지 이단 또는 사이비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기준은 신의 의지에 준하기 보다는 그들의 근본주의 바리새적 교리에 준하기 때문이다. 이미 교리적 교황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이단인 것이다. 정통과 이단의 문제가 오늘에만 있지는 않았다. 이 문제는 기독교가 발생한 이래 계속 있어 왔다.

끔찍했던 중세의 마녀 사냥과 이단화형도 모두 이단의 문제였고, 위대했던 신앙인 위클리프와 조르다노 브루노의 죽음도 모두 이단 심판에 의한 것이었으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겪은 모욕도 모두 이단이라는 제목이었다. 이들이 모두 이단이었는가? 그랬더라면 오늘에 이르러 교황이 기독교회가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교황청이 저질러온 이단심판과 파문에 대해 새롭게 사과했다.

왜 이런 일이 계속될까? 오늘의 이단 심판의 기준으로 삼는 교리는 미래의 어떤 때에 또다시 과오라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그럴 것이다. 과오가 인간의 본질이고 또한 이단 심판의 기준인 교리도 신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몰지각한 자들에 의해 타락하고 또한 미신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다. 

타락한 이단감별사, 근본주의자들은 신도들을 위협하거나 압박하고 소명 기회도 주지않고, 교권으로 이단의 굴레를 씌운다. 이단감별사들은 자신의 권능으로 모두를 이단으로 만들고 지옥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신의 위치로 격상하고 있다. 천국과 지옥은 개인적 신앙의 문제이지 이단감별사들의 권능이나 교리적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단심판자 집단은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의 태만하고 안일한 신앙은 교리에 집착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어떠한 경건주의도 부정한다. 자신들의 태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자체가 영국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열정적인 경건주의에 힘입었다. 이것이 왜 이단인가? 열정적 신앙이 이단인가? 교리는 신앙을 넘어서는 것인가? 교리는 초기교회 이래로 종교회의의 타협과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최초의 본격적인 종교회의인 니케아 회의에서부터 오늘의 여러 종교회의에 이르기까지 성경과 신앙에 근거 모두 개념화하였다. 개신교단이라할지라도 교단마다 각각 차이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정통과 이단을 구분 짓는가? 엄격하게 말하면 신앙에 관한한 교리도 중요하지만 구원의 문제는 교리가 아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신앙고백의 문제이다. 신앙을 교리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의 영역은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3. 양심과 신앙 

신앙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에 기초한다. 우리 모두는 어떠한 종류의 신념도 품을 자유를 가진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종류의 신앙도 가질 수 있다. 칼빈은 “(신앙의) 교리는 인간의 머릿수만큼 많다”고 말한다. 이 교리가 신앙의 기초라면 이 머릿수만큼 많은 교리는 당연히 그 만큼 많은 수의 신앙을 불러들여야 한다. 그러나 칼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신앙은 교리를 넘어서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첫 번째 요건은 신 앞에서의 겸허이다. 신의 무한함과 전능함에 비춰 인간의 지식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신에의 무조건적인 복종이 신앙의 태도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귀를 기울임이 양의 기름보다 낫다.”

교리는 인간이 감히 신의 의지와 요구와 명령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교리는 사람들이 합의하여 신에 대한 신앙의 기준점을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지침이다. 교리는 사람의 영역이고 신앙은 신의 영역이다. 각자의 신앙은 전적으로 교리로부터 자유한다. 신앙은 교리를 극복한다. 그러나 이단감별사들은 근본주의 교리의 원칙을 갖고 신에 대한 신앙을 재단했다. 지식으로 남의 신앙을 매도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편협한 신학적 지식을 갖고서 신의 영역인 개인의 신앙을 재단했다. 교리는 하나의 지침이고 신앙은 구원의 영역이다.    
 
그들은 대부분 양태론이라는 교리적 원칙갖고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의 신앙을 이단으로 재단했다. 신의 구원의 영역을 마치 인간의 영역인 것 처럼  지식갖고서 신앙을 재단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적 지식 갖고서 신앙의 영역인 성부 하나님의 아들을 이단으로 재단한 것과 같다. 
 
이단감별사들은 근본주의 교리나 자신들이 신봉하는 왜곡된 교리적 지식 갖고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함부로 이단이라고 정죄했다. 교리는 인간의 영역이고 신앙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바리새인들과 교황에 맞먹는 죄악이다. 어느덧 이단감별사들은 로마 교황청의 교황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지식 갖고서 신앙을 재단할 수 있다는 미신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단감별사들은 자신들의 근본주의 교리갖고서 남의 신앙을 재단하기 위해  인간의 지식에 의존하는 오만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 교리에 관한 한 모든 신앙은 자유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교리의 기준갖고서 판단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인간의 교리갖고서 판단하는 것 조차가 오만한 것이다. 
 
4. 종교와 규약

나는 여기서 모든 종류의 종교와 신앙이 전적인 자유를 누린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확실히 금지되어야 하는 신앙이 있다. 자유는 공동체의 합의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개혁신학 역시 개혁신학자들의 합의일 뿐이다. 개혁신학자들의  교리적 합의가 모든 신앙을 구속하지 않는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각자의 행위는 직접 그리고 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유이다. 그 때 그는 스스로에 대해 군주이다”고 말한다.
 
이단에 관한한 신중해야 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남에게 해를 끼칠 때이다. 많은 해악이 신앙에 의해 저질러진 것은 사실이다. 그때 그것은 물론 신앙은 아니었다. 단지 신앙의 이름을 빙자한 것이었다. 이단감별사들은 교리의 이름을 갖고 남의 고귀한 신앙을 재단하고 짓밟고 있다.  

구원과 정죄는 오로지 신의 영역이다. 따라서 이때조차도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면도날은 단지 교회사를 통하여 다수가 약속한 부분에 의해서 재단되는 것이다. 타락한 신앙은 내재적으로 정화될 수 있다. 많은 신앙들이 때때로 자발적인 노력으로 정화되었다. 종교개혁 이후의 로마 카톨릭은 그 전에 비해 훨씬 정화되었다.

이단 심판은 사실은 질투이고 탐욕이다. 경건주의에 대한 질투이고 자기들만의 이익에의 탐욕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면에 기초한 이단심판은 무의미하다. 정치와 금권이 결탁한 이단심판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이단판단은 그리스도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거나 2,000년 정통교회사에 나타난 신론, 기독론에 명백하게 벗어나는데 제한점을 두어야 한다.   
 
이외에 이단은 실정법에 벗어나는 윤리 도덕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것이 사회에 해를 끼치느냐 그렇지 않느냐 이다. 교회법 역시도 실정법의 테두리 내로 제한된다. 왜냐하면 교회법이나 교회교리 모두가 사회적 법률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이의 하나의 규약이기 때문이다. 이때 실정법은 교회법의 상위에 있다. 따라서 어떤 교회가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기만에 의해 이득을 취하거나 폭력적으로 다른 교회나 신도를 대할게 했을 때의 처벌은 실정법에 맡겨야 한다. 교회 내의 분쟁역시도 자체 내의 해결이 불가능할 때 민간법정으로 가고 있다.
 
 5. 그대가 교황인가?

영국의 최초의 신교도들이 교황을 제사장(Pontifex Maximus)으로 불렀던 이유는 교황이 행사하는 그 미신적 기능이 마치 제사장과 같았기 때문이다. 제사장의 권위와 권력은 어디에 기초하는가? 그것은 그가 신의 의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미끼로 권력과 금력을 쥐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성직자들이 신의 의지와 뜻을 아는 것처럼 하여 권력과 금권력을 쥐고 있고 신도들은 맹종의 위치로 전락하고 있다. 

신에 대한 지식을 신앙심에 앞세우는 종교는 언제라도 미신으로 전락한다.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 카톨릭은 또 다시 “우리는 신앙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거기에 따르는 행위에 의해서 구원 받는다”고 말한다. 이 때 “신앙에 따르는 행위”란 무엇인가? 그들은 신의 뜻에 맞는 행위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신의 뜻을 어떻게 아는가? “신학을 통해서”라고 한다면 나는 묻겠다. 어떤 신학을 통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통하여? 오컴의 신학을 통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통하여? 칼빈의 신학을 통하여? 웨슬리의 신학을 통하여?

신학은 다양하다. 심지어 오컴의 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교황청은 이 많은 신학 중 자신들이 구사하기에 가장 좋은 신학을 선택할 뿐이다. 따라서 신학 역시도 규정과 선택의 문제이다. 이 신학에 입각해 교황청은 마음껏 미신을 행사했고 마음껏 파문을 행사했다. 신의 의지를 알고 있고 따라서 그가 천국에 이르는 자동문을 열고 닫는다는 말을 할 때 그것이 미신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단감별사들의 교리나 신학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근본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그들은 마음껏 미신을 행사하고 사람을 정죄한 것이다. 개신교에서도 칼빈의 신학과 웨슬리의 신학이 충돌한다. 침례교와 오순절의 신학도 다르다. 이단감별사들의 신학이 신앙의 기준이라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메이첸의 신학이 이단판정의 원칙인가? 그렇다면 웨슬리신학이 기준인가? 그들의 신학이 이단판별의 원칙이라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이들의 신학이 하나님이 요구하고 좋아한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로마 카톨릭은 이미 미신으로 출발했고 개탄스럽게도 한국의 교회도 신앙보다 교리주의로 전락하고 있다. 이 하나의 증거가 이단 판정이다. 그들은 근본주의 교리적 원칙의 토대하에 제도적인 권위를 힘입어 자신들이 신봉하는 신학에 벗어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마구잡이로 이단판정을 하고 있다. 교리로 신앙을 구속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은 인간의 교리나 신학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교리갖고서 이단을 정죄하는 일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이단판단은 정상적인 목회자들이 더 이상 성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단판단자들이 자신들이 배우거나 조합해 놓은 조악한 신학에 의해 신앙을 독점하고 천국에 이르는 열쇠를 개인의 신앙에 달린 것이 아니라 교리의 준수에 달린 것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이미 교황처럼 미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 다시 교황이 되고자 하는가? 나는 이단감별사와 최삼경목사에게 묻고 있다.

 “그대가 교황인가?”

황규학 논설위원  finland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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