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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열전 19] 카지노의 황태자, 래리 우 타이 친(下)

한국전쟁 기간 친은 미 육군 통역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표면적으로는 미 육군연락처(ALO) 소속이었다. 이 기구는 실상은 육군뿐만 아니라 중앙정보국(CIA), 국무부까지 포함한 합동기구였다.

ALO에서 친의 주 임무는 포로로 잡힌 중국군(중공군)에 대한 신문 과정에서 통역이었다. 1년가량의 이 기간은 친에게는 '황금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통역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이 오매불망 기대하던 귀중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가끔 고의로 오역을 함으로써 미군이 귀중한 반격의 기회를 놓치도록 했다.

▲한국전 당시 미해병대에 포로로 잡힌 중공군 ⓒ위키피디아

◇ 귀순 의사 밝힌 중국군 포로 수천 명 사지로 내몰아…보너스로 거액 수령

ALO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그가 저지른 가장 큰 범죄는 바로 신문 과정에서 귀순 의사를 밝힌 포로 수천 명의 신원 정보를 중국 측에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강제로 끌려 나온 상당수 포로는 미군의 '따뜻한' 대접에 한국이나 대만 또는 미국으로의 귀순 의사를 밝혔다. 친은 귀순 의사를 신문 과정에서 밝힌 포로들의 이름과 주소 등을 중국 측에 전달했다.

특히 포로들이 군사적으로 얼마나 민감한 정보를 미국 측에 제공했으며, 심지어 포로 생활 과정에서 얼마나 협조적이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려주었다.

불행히도 귀순 의사를 밝힌 포로들 가운데 희망이 받아들여진 숫자보다 종전협정으로 귀국길에 오른 수가 더 많았다. 귀순 의사를 밝혔지만 송환된 포로들은 재교육자 대열에 포함돼 강제수용소로 옮겨졌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처형대에 섰다.

이듬해인 1952년 친은 CIA가 운영하는 해외방송정보국(FBIS)으로 옮겼다. 근무지는 일본 오키나와(沖繩)였다. 이곳에서 CIA는 중국 남부 지역을 청취권으로 반공 선전공작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었다.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카데나 미 공군기지 ⓒ위키피디아

친은 휴가 때마다 홍콩으로 가서 공작관인 쿠이밍과 접촉,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다. 정보 제공의 대가로 거액의 현금이 제공됐다.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빠듯한 급여를 받아온 친에게 현금다발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값비싼 산해진미, 해외 휴가여행, 영화배우 뺨치는 미녀들과의 데이트 등 예전에는 꿈꾸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모두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 돈과 도박의 노예로 전락…죄책감 없는 이중생활

중국 측에 넘겨주는 정보량이 많아질수록 들어오는 주머니도 덩달아 두둑해졌다. 그러나 친은 이중생활에 철저했다. 낮에는 성실하고 겸손한 중국계 직원으로 행세했지만, 밤에는 사치 생활에 탐닉했다. 밤 생활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 바로 도박이었다.

도박에 거액을 잃어도 별다른 내색도 하지 않았다. 주위 동료들은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이주해온 집안이 준재벌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도박에서 돈을 좀 많이 잃었다 싶으면 제공하는 정보량을 늘이면 됐다. 그러나 친은 결코 도박에만 탕진하지 않았다. 미국 본토 이주를 꿈꿔온 그는 상당액을 증권, 부동산, 예금 등으로 분산했다.

이 결과 그는 미 본토로 옮긴 1961년 무렵에 증권에만 70만 달러를 투자한 상태였다. 홍콩 은행에 예치한 예금도 20만 달러나 됐다. 본토로 이주한 이후에도 그의 도박 행각은 끝나지 않았다. 라스베이거스에서는 그가 초우량고객으로 대접받았다.

◇ 절정에 이른 스파이 활동…닉슨 대통령의 對中 개방 정책까지 전달

서부 캘리포니아주의 FBIS 지부에서 일한 지 4년 뒤 친은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뛰어난 어학 재능으로 그는 다시 1970년 동부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FBIS 본부로 영전했다. 본부는 실상 CIA의 자회사나 마찬가지였다.

본부로 옮긴 그가 수행한 주 업무는 중국에서 나오는 방대하고 다양한 자료(정보)의 번역 업무 총괄이었다. 직책을 이용해 그는 중국 내 암약한 CIA의 비밀공작원이나 현지 협조자들이 보내온 온갖 민감한 정보와 CIA에 포섭된 대만인들이 제공한 고급 정보 보고서 등을 쉽게 열람할 수 있었다.

특히 CIA가 대만인들을 U2 첩보기 조종사로 고용해 중국 본토 상공에서 수행해온 정찰 활동을 친은 훤히 꿰뚫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친이 거둔 가장 큰 성공은 1972년 미국과 중국의 수교 시기였다. 친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 행정부가 추진하려던 대중(對中) 정책 변화 내용을 속속들이 중국 측에 넘겨줬다.

중국 측은 친을 통해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주도하던 대중 개방 정책의 소소한 부분까지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중국 최고 지도자들에 대한 키신저의 개인적인 평가 정보까지 넘겨받을 수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는 친은 미국과 중국 양국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1981년 은퇴한 이후에도 그는 계속 CIA의 고문자격으로 스파이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그에 대해 미 정보기관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 공작관 꾸이밍의 망명으로 들통…재판 당일 자살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은 스파이 세계에서 불변의 진리다.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던 친에게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1982년 쿠이밍이 중국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미국에 망명하면서부터다. 쿠이밍은 온갖 종류의 정보를 미국 측에 건넸다.

쿠이밍은 친이 오랫동안 중국의 비밀 스파이로 암약했으며, 그를 발굴해 키웠고 관리했던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CIA의 충격은 엄청났다. 결국 연방수사국(FBI)이 친의 행적에 대한 장기수사에 들어갔다.

▲마오쩌둥(오른쪽)과 환담하는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왼쪽) ⓒ위키피디아

신문 과정에서 친은 FBI 수사관들에게 자신의 행위가 미국과 중국의 우호를 위한 것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수사관들이 쿠이밍이 모든 사실을 실토했다고 밝히자 마침내 혐의 사실을 인정했다.

1986년 친은 간첩죄와 세금포탈죄로 기소됐다. 그러나 그의 감옥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선고 공판 당일인 같은 해 2월 21일 친은 구치소에서 쓰레기봉투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자살했다.

<참고문헌>

*Ernest Volkmannn, Spies: The Secret Agents Who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1994)

*Jeffrey Richelson, A Century of Spies(1997)

(서울=연합뉴스) 김선한 기자

연합뉴스  sh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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