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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교단의 시일야 방성대곡사랑과 용서대신 정죄의 선택은 기독교의 정체성의 상실

사면대상자들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의 총회임원회, 총회결의의 효력정지 가처분의 소를 서울 중앙지법에 제기하므로 용서에 대한 문제를 사법부가 판단하게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100회 총회임원회의 사면철회결의, 101회 총회의 사면철회결의 등에 대한 적법성의 문제를 사법부가 판단하게 되어 개신교의 권위는 땅에 추락한 것이다. 개신교는 시일야방성대곡을 해야할 것이다. 용서의 문제를 개신교 자체가 판단할 능력이 안되자, 가이사 법정이 판단하게 되었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이 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뜻으로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 사설란에 실린 장지연의 논설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11월 17일 대신들을 압박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조약 체결에 찬성하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 대신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황성신문》의 사장이자 주필로 있던 장지연은 이 글에서 “우리 대황제 폐하의 강경하신 성의(聖意)로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그 조약의 불성립함”이라며 고종(高宗)이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저 돼지와 개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영달과 이익만을 바라고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두려움에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다며 조정 대신들을 격렬히 비판했다. 특히 “저들 돼지와 개만도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을 비롯한 각 대신들이야 족히 깊이 꾸짖을 것이 없거니와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으뜸 벼슬임에도 단지 부(否)자로 책임을 면하여 명예를 구할 기회를 꾀하였던가”라며 박제순 등 조약 체결에 찬동해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불린 다섯 대신뿐 아니라 참정대신 한규설 등 조약에 반대한 대신들도 조약 체결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다고 함께 비판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너희 중에 판단할 사람이 없어서 세상법정에 호소하느냐고 했다. 예장통합측엔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하나도 없기에 가이사 법정에 호소한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종말이자 고린도교회의 부활이다.   

1.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고전 6:1-6)


용서의 문제를 판단할 사람이 없자, 사면대상자들이 고린도교회처럼 세상법정에 호소한 것은 이미 개신교의 권위가 고린도교회처럼 추락되었기 때문에 개신교는 시일야 방성대곡을 해야할 것이다. 용서를 했다가 취소하는 것은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불행이다.   

이러한 사실은 개신교 정체성의 심각한 부재를 말해주는 것이다. 가이사 법정이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과 용서의 문제를 판단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져 죽은 것이다. 이제 개신교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외쳐야 할 것이다.    

용서하고 철회하는 것은 예장통합교단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설교나 축도를 하고 정서적 정치적 압박으로 취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기철 목사도 살아남기 위해서 신사를 종교로 보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철회했다면 고문을 당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성경의 계명을 져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채영남 목사의 사면철회로 인해 사면에 대한 진위여부를 사법부가 판단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일종의 개신교 개그이다. 제27차 신사참배 가결이후 기독교정신의 정체성의 상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기독교의 심벌인 사랑과 용서에 대한 것을 가이사 법정이 판단한다는 것은 장로교단의 정체성과 기독교 본질을 상실한 것으로 기독교의 정신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용서를 거부하는 기독교는 더이상의 기독교가 아니다. 용서와 사랑은 기독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예수 바라바 vs. 예수 그리스도

용서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교단이 하늘의 신념보다 땅의 신념을 선택했기 때문에 찾아오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어떤 사본에는 바라바의 이름이 '예수 바라바'로 되어 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대신 '예수 바라바'를 선택한 것이다. 통합교단은 '예수사면대상자'대신 '예수정죄자'를 선택했다.   

통합교단처럼 회개하는 자에 대한 사랑과 용서가 없으면 이는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마니교의 어거스틴처럼 이단이라도 회개하면 받아주는 것이 기독교이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한번 이단이면 영원한 이단이었다. 딴나라 종교였다. 지금은 통합교단이 용서와 사면대신 다수의 결의로 정죄를 선택한 것에 대해 이날을 목놓아 통곡할 때 이다.

사면대상자들로부터 효력정지 가처분의 소가 서울중앙지법에 접수되었다. 사면선포철회에 대한 효력정지가처분의 소가 인용되면 예장통합교단은 재를 뒤집어 쓰고 시일야방성대곡을 할 날이 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단에 패소한 교단이라는 닉내임에 교인이탈의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용서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개독교이기 때문이다.

황규학 논설위원  finland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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