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 연재
[스파이열전 2] 스탈린의 '007'- 리하르트 조르게(上)

◇ 풍전등화 직전에 날아든 '도쿄발 낭보'

남은 희망은 '시베리아군'과 극동군밖에 없었다. '바르바로사'(Barbarossa)라는 작전명으로 단행된 나치 독일군의 기습 침공(1941년 6월 22일)으로 소련군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소련군의 패주는 당연했다. 국가 누란의 상황에서 군을 이끌 지휘부가 사실상 와해한 탓이었다. 이는 최고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이 6년 전인 1938년 6월에 단행한 군부 대숙청에서 비롯됐다.

이듬해까지 진행된 대숙청은 거셌다. 숙청의 광풍은 군 현대화의 선구자로 항공력과 기갑 전력을 이용해 두터운 적 후방의 방어력을 돌파해 분쇄하는 소위 '종심작전이론'의 창시자인 미하일 투하쳅스키 국방장관 겸 국방인민위원 대행(원수)을 중심으로 한 고위 장성 8명이 나치를 위해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즉결처형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원수 5명 가운데 3명, 군관구 사령관 15명 중 13명, 군단장 85명 중 50명, 사단장 195명 중 156명, 여단장 406명 중 220명 등 4만 명 이상의 군 지휘관들이 숙청됐다. 여단장급 이상 간부 45%가 없어진 셈이었다.

유능한 고급 지휘관들의 부족은 소련군의 전력을 현저히 떨어뜨렸다. 게다가 핀란드와의 전쟁(1939∼1940)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독일군이 침공한 상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수도 모스크바의 관문인 스몰렌스키가 8월 초 함락돼 31만 명이 포로가 된 데 이어 9월 중순에는 키예프를 점령한 독일군은 60만여 명의 포로와 탱크 2천500여 대와 중포 4천여 문이 독일군 수중에 넘어가는 등 전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리하게 전개됐다.

스탈린의 불안은 갈수록 더해갔다. 패전에 대한 속죄양으로 서부전선 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사령관을 반역죄로 총살하고 전시 동원령과 함께 주민들과 주요 산업시설을 시베리아 등 동부로 긴급하게 이동할 것 등을 지시한 상황에서도 불안과 의심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스크바의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다는 불안에 견딜 수가 없었다. 모스크바를 방어하려면 다행히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던 최정예 시베리아군과 극동군의 투입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해 배치한 극동군을 모스크바 등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기란 어려웠다. 독일과 함께 추축국인 일본이 극동을 통해 침공하는 협공 가능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소련 불침공 정보를 입수해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소련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위키미디어서 캡쳐)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전격 침공한 독일군(위키미디어 사진 캡쳐)

실제로 나치 독일의 절대권력자인 히틀러도 일본이 극동방면에서 소련을 공격해 소련군 주력을 분산시켜줄 것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일본 내 친독파들은 동맹으로서 히틀러의 이런 요청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친독파들은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힘을 합친다는 내용의 방공협정을 독일과 체결(1936년 11월)한 마당에 독일군의 소련 침공으로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며 정치적 압력을 가했다. 군부의 압력도 만만찮았다. 특히 소련과 국경을 맞댄 관동군 지휘부는 소련이 독일군의 공격에 정신이 없는 사이 극동 방면에서 공세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무적을 자랑하던 관동군에게 사실상 첫 대패를 안겨준 몽골 할힌골(노몬한)전투'(1939년 5∼8월)의 설욕을 만회하겠다는 의욕도 작용했다. 그러나 일본은 결국 소련 침공 대신 남방 진출을 선택했다. 표면적으로는 독일 침공 2개월 전에 체결한 일-소 중립조약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깬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시베리아의 맹추위와 노몬한 전투에서 입증된 소련군의 전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특히 석유와 천연고무 같은 전략 자원의 확보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자원이 풍부한 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권에 대한 유럽 열강들의 권력 공백 상태가 현실로 나타난 것도 한몫했다.

나치 독일에 이미 점령됐거나(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처럼 이에 맞서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유럽 열강들이 동남아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을 거의 상실한 상황에 남방으로 진출하면 큰 힘 들이지 않고 쉽게 차지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셈법에서 나온 것도 물론이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9월 14일 낭보가 찾아들었다. 보낸 사람은 독일 언론사 특파원 신분으로 위장한 채 일본에서 암약해온 군총참모부 산하 정보국(GRU)소속 요원 리하르트 조르게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련 최고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왼쪽)(플리커닷컴서 캡쳐)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함락하기 전까지 일본은 소련을 침공하지 않고 대신 자원 확보를 위해 남방으로 진격한다는 것이 조르게가 타전한 정보의 요지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조르게를 포함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비밀 정보 요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모두 나치 독일이나 일본에 '매수된' 이중간첩이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런 의심은 해외 곳곳에서 쏟아진 나치 독일의 침공 정보보고를 무시하는 '대실책'을 자초했다. 결국, 독일군이 코앞까지 진격한 상황에서 스탈린은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조르게의 정보를 믿기로 했다. 스탈린으로서도 이는 큰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이겐 오트 일본 주재 독일 대사 등 '확실한' 출처에서 나온 이 정보를 받은 스탈린은 곧장 제21, 28, 32, 78, 92보병사단, 제58, 60 탱크사단 등 18개의 사단과 1천700여 대의 탱크와 1천500여 대의 항공기 등 극동군 전력을 시베리아군에 합류시켜 모스크바 방어전에 투입했다.

이 상황에서 기후도 오랜만에 스탈린을 도왔다. 50년 만에 찾아온 강추위 때문에 모스크바를 에워싼 독일군의 진격이 주춤해진 사이 혹한속 동계작전에 익숙한 시베리아군과 극동군의 투입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때처럼 독일군도 혹독한 소련의 기후를 견디는 복장을 갖추지 못했다. 이런 독일군에게 흰색 설상복을 입은 시베리아군과 극동군의 출현은 마치 유령이 나타난 것처럼 공포의 대상이 됐다.

전쟁 발발 직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킨 시베리아군에 합류한 극동군의 맹활약 덕택에 스탈린은 모스크바 방어전에 성공하고, 다시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전기가 됐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조르게의 정보가 없었다면 소련의 운명과 현대사의 흐름이 바뀌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의심이 많은 스탈린이 조르게의 정보를 처음부터 신뢰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철저히 조르게의 활동과 그가 보낸 정보를 깎아내렸다.

이런 스탈린이 얼마 되지 않아 조르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한 데는 그가 보낸 정보를 무시한 대가가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이다.

(서울=연합뉴스) 김선한 기자

연합뉴스  shkim@yna.co.kr

<저작권자 © 연합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연합뉴스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