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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열전 16] 중국의 '붉은 공포', 캉성(上)

"마약 중독자," "기회주의 끝판왕," "중ㆍ소 분쟁의 배후 조정자," "붉은(紅色) 공포," "마오쩌둥(毛澤東)의 숨은 채홍사," "중국 원폭 개발을 앞당긴 최고의 스파이," "중국 정보기관의 대부," "문혁 기간 사회 혼란의 주범,"…

모두 한 사람에 대한 평가다. 부정적인 내용이 주류인 평가의 장본인은 중국 공산당 정보기관의 대부 격인 캉성(康生ㆍ1898∼1975)이다.

캉성은 한국 현대사와도 무관치 않다. 미국의 여성 언론인 겸 작가인 님 웨일스가 1937년 펴낸 '아리랑'의 주인공인 한국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을 스파이 혐의로 처형을 지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시 캉성은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인 산시 성(山西省) 옌안(延安)에서 중국 공산당의 초기 정보ㆍ보안기관인 중앙사회부장으로 '내부 스파이' 색출과 무자비한 숙청을 주도했다.

중국 공산당의 최고 권력자인 마오쩌둥(왼쪽)과 환담하는 중국 정보기관의 대부 캉성(맨 앞 오른쪽)[위키피디아 제공]

'연안 정풍'운동으로 알려진 이 광풍 속에 수많은 사람이 스파이나 반당(反黨) 분자로 내몰려 희생됐다. 김산도 이 '붉은 공포'의 희생자였다.

최소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문화혁명(1966∼1976)의 기획자로 알려진 그는 1975년 사망 당시 공산당 중앙정치국원 겸 부주석으로 권력 4위 자리까지 올랐다.

캉성의 일생은 대하드라마 소재로도 충분할 정도로 파란만장하다.

◇ 유학자 지주 집안의 '금수저'로 출생…소작인 착취하는 집안에 맞서 개명

본명이 장슈핑(張叔平)인 캉성은 공산주의자에게는 맞지 않는 집안 출신이다. 중국 동북부 산둥(山東) 성 칭다오(靑島)에서 알아주는 유학자 겸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 마디로 '금수저' 출신인 셈이다.

지주의 아들이지만 어릴 때부터 소작인들이 착취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괴로워했다. 이런 고민은 그가 독일계 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고향 부근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더 커졌다.

이에 그는 착취에 몸이 밴 아버지의 뜻에 따르지 않기로 하고 이름을 캉성으로 바꿨다. 서구열강과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 야욕에도 권력 다툼만 하는 위정자들에 실망한 캉성은 1922년에 공산주의에 처음 눈을 떴다.

체계적으로 공산주의 공부를 하기 위해 그는 1924년 상하이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상하이대학은 당시 지식층 공산주의자들의 메카였다. 캉성은 이듬해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 본격적인 공산주의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캉성은 당의 지시로 노동운동과 지하조직 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군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된 1927년 상하이 쿠데타에서도 참가했다.

1920년대 중국 상하이 국제조계의 모습[위키피디아 제공]

공산주의자들을 적발해 숙청한 이 쿠데타 과정에서 캉성은 상하이 경찰을 상대로 첩보활동을 전개했다. 경찰의 사전 움직임을 파악해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또 살인 청부업자들을 동원해 조직 이탈자나 배신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공작도 폈다. 이런 공로로 캉성은 당중앙위 후보위원에 올랐다.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공산당 지도부가 캉성의 이런 능력을 소홀히 보진 않았다.

특히 국민당 비밀결사 조직 겸 정보기관인 '남의사'(藍衣社)에 의해 공산당 최고 지도부 상당수가 검거돼 전향하자 저우언라이는 정보ㆍ보안기관인 중앙군사위원회 특별임무위원회 특별공작과를 발족해 수장에 올랐다.

훗날 '서후이부'(社會部)로도 유명해진 이 부서에 캉생은 저우언라이의 천거로 이인자에 올랐다. 1931년 저우언라이가 새로운 공산당의 근거지인 장시(江西) 성으로 떠나자 캉성은 이 조직의 최고 책임자로 부상했다.

거의 2년 동안 캉성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국민당에 맞선 첩보공작과 함께 공산당 내에 잠입한 첩자들을 상대로 한 방첩활동에 전권을 행사했다.

◇ 모스크바 유학길서 터득한 NKVD의 '선진 기법'

신생 조직 수장으로 여념이 없던 그에게 1933년 공산당 지도부는 소련행을 지시했다.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국제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 내 중국 대표 자격이었다. 4년간의 모스크바 체류는 캉성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됐다.

우선 1934년 10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1년 동안 이뤄진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을 피할 수 있었다. 장제스가 이끈 국민당군의 무자비한 공산당 토벌작전을 피해 중국 남북으로 횡단한 '2만5천 리'의 이 대장정에서 출발 당시 8만7천여 명이던 공산당 병력은 산시(山西) 성 옌안(延安) 북쪽 우치(吳起)에 도착했을 때는 2만5천여 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이런 엄청난 희생 대열에서 캉성은 합법적으로 빠질 수 있었다.

둘째는 소련 비밀경찰 겸 정보기관인 NKVD로부터 선진화된 '특별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모스크바 체류 시절은 소련 독재자 요지프 스탈린이 주도한 대숙청 기간과 겹쳤다.

캉성은 이 기간 소련 공산당 내 반대파들은 물론이고 중립적인 태도를 보인 국민에 대한 스탈린의 숙청 광풍을 똑똑히 지켜보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NKVD는 긴밀한 협조 체제를 구축한 그에게 반대파 색출과 숙청 등 '체계적인' 일련의 선진 기법을 고스란히 전수했다. 또 자신이 이끄는 코민테른 중국부 내에 반혁명분자 숙청부서를 조직해 모스크바 내 중국인 반혁명세력을 탐지해 숙청하기도 했다.

소련 거주 외국인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온갖 구실로 숙청해온 스탈린은 유독 캉성에게만은 관대했다. 이는 일본의 극동 침략 야욕이 극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위협을 느낀 스탈린으로서는 견제 세력으로 중국 공산당을 포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숙청의 전위대 격인 NKVD의 수제자 격인 캉성을 '특별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스탈린은 4년간의 모스크바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하는 캉성에게 특별기를 내줄 정도로 애정을 표시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런 호의에도 캉성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불과 4개월여 전에 일본이 베이징(北京) 외곽의 작은 돌다리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중국군과사소한 충돌을 빌미로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전쟁(중일전쟁)을 선포하고 파죽지세로 진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옌안 복귀는 캉성에게 또 다른 전기가 됐다. 이것은 그가 평생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선한 기자

연합뉴스  sh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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