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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열전 15] 타고난 비밀경찰, 펠릭스 제르진스키(下)

볼셰비키가 정권 장악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수많은 위험요소가 존재했다. 우선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독일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러시아군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 전선에서 독일군에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더 큰 위협은 내부 요인이었다. 귀족 등 반(反) 볼셰비키 무장세력인 '백군'이 러시아 영토 상당수를 장악한 채 일전을 선포한 상태였다. 앞으로 5년 동안 전개될 내전이 발생한 상황이었다.

볼셰비키와 백군 간에 치열했던 러시아 내전의 한 장면[위키피디아 제공]

설상가상 독일과 독자적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해 전쟁에서 발을 빼겠다는 레닌의 전략에 반발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이 공개적으로 러시아 문제에 개입하겠다고 천명했다. 신생 볼셰비키 정권으로서는 자칫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할 우려가 컸다.

◇ "완벽한 권한과 상부 지휘 감독을 전혀 받지 않는다"

이런 대내외적 위협에 대응해 레닌은 내란이 발생한 지 1개월 후인 1917년 12월 제르진스키를 반혁명 요소 척결 관련 비상 조직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레닌이 가장 우려한 것은 볼셰비키 정권 전복 시도였다. 여전히 권력을 장악한 알렉산드르 표도르비치 케렌스키의 정부군, 수적으로는 절대 우위인 우파 멘셰비키 일파, 전국 곳곳에서 위력을 떨치는 제정 시대의 친위대와 비밀경찰 오흐라나 등 취약한 신생 볼셰비키 정권을 무력으로 전복시킬 수 있는 반혁명 세력이 득실거렸다.

'반혁명ㆍ태업 단속을 위한 전 러시아 비상위원회'(일명 안보 소위원회)라는 긴 명칭을 가진 신생 조직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책임자 제의를 수락하기 전에 제르진스키는 요구사항을 늘어놓았다.

요구사항은 무리한 것이었다. 완벽한 권한과 어떤 식으로도 상부의 지휘 감독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 이는 제르진스키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상징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레닌이 이를 그대로 수용한 진짜 이유는 앞으로 제르진스키가 맡을 과업이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요행이 실현되면 좋고 안돼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레닌의 판단이었다.

◇ 공포의 상징, 체카 탄생…단기간에 진가 발휘

약어로 체카(Cheka)로 불린 안보 소위원회의 시작은 보잘것없었다. 요원 수가 24명에 불과한 데다 자체 건물도 없이 루뱐카 거리의 좁은 사무실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제르진스키와 체카는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부족한 요원 충원작업도 빠르게 이뤄졌다. 모집된 수천 명의 요원 대부분이 성격이 난폭하고 무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요원들은 제르진스키의 명령에 절대복종했다.

러시아 내전 당시 체카의 반혁명분자 총살형 집행 장면[위키피디아 제공]

"시키는 대로 해라. 그렇지 않으면 즉결 처분되거나 평생 감옥에서 살게 될 것이다. 또 우리는 조직화한 테러를 표방한다." 제르진스키의 지시는 간단명료했다. 볼셰비키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발본색원하라는 지시였다. 그는 또 이를 실행하는 특별경찰을 전국에 파견했다.

뛰어난 결단력을 무기로 한 제르진스키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역점사업 중의 하나가 오흐라나 간부들의 체포였다. 거의 모든 전직 간부들이 체포돼 끌려왔다. 그들에게 죽음의 공포와 장기 수감의 위협을 가하는 다른 한편으로 볼셰비키 정권에 가담해 '가치 있는'역할을 하도록 회유가 잇따랐다.

아무리 처단하고 싶은 존재였지만, 오흐라나 전직 간부들이 가진 비밀사찰과 공작 노하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회유를 받아들인 간부도 꽤 됐다.

앞서 장악한 통신수단도 큰 힘이 됐다. 우편, 전신, 전화와 공문서 전달꾼에 이르기까지 모든 통신수단을 장악한 덕택에 체카는 반혁명 세력의 움직임과 민심 동향을 신속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혁명 전에 보험회사였던 곳으로 본부를 옮긴 제르진스키는 감방과 고문실까지 만들었다. 연행된 사람들을 구금하고 이들로부터 정보를 캐내기 위한 고문을 하는 특수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백 명 이상이 이 건물에 끌려와 벽 뒤로 사라졌다.

끌려온 사람 가족에게는 몇 주 후 간단한 공문이 배달됐다. 공문에는 실종자가 밝힐 수 없는 '반혁명적 행위'를 한 혐의가 발각돼 처형됐다는 사실만 적시됐다. 이 건물은 이내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다.

◇ 일벌레 제르진스키…외국 간첩망 타진과 '붉은 테러' 공작

제르진스키의 하루 평균 근무시간은 20시간이었다. 금욕을 미덕으로 삼는 수도승처럼 그는 좁은 집무실에 틀어박힌 채 산더미 같은 기록에 파묻혀 쉬지 않고 일했다.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 생활에서 얻은 천식에도 그는 오직 일에만 매달렸다.

발족한 지 불과 일 년 만에 체카의 정식요원 수는 10만 명으로 급증했다.

조직이 어느 정도 안착하자 제르진스키는 방첩부서를 발족했다. 방첩부서는 볼셰비키 정권 타도를 지원할 가능성이 큰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대사관을 예의주시했다.

1924년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의 수장인 레닌의 시신이 든 관을 운구하는 펠릭스 제르진스키(맨 앞 인물)[위키피디아 제공]

이와 관련해 그는 라트비아 출신 군인들로 친위 경비부대를 발족했다. 이 부대원들은 반정부적인 성향을 가진 것으로 위장했다. 서방 외교관들에게 경호를 자청해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한 이 위장 부대 덕택에 체카는 쿠데타 계획의 전모를 파악하는 한편 영국 비밀정보국(SIS)과 미국 국무부 정보국에 포섭된 일련의 러시아 내 정보 제공 조직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체카는 그리스계 미국인 사업가 크세노폰 칼라마티아노를 정점으로 한 200여 명의 서방 스파이들과 조력자들을 일망타진했다.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레닌의 암살 기도 사건(1918년)이 발생하자 격분한 제르진스키는 '붉은 테러'라는 이름의 숙청공작을 직접 지휘했다. 그는 500여 명의 제정 러시아 시대 관료들을 체포해 체포 즉시 처형했다. 별다른 혐의가 없는 데도 수천 명의 시민을 체포해 역시 총살해버렸다.

이런 잔혹함으로 제르진스키는 레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국민으로부터는 죽음의 사자로 인식됐다. 레닌에게 제르진스키는 '만능해결사'이기도 했다. 철도 체계의 혼란으로 러시아 전역에 대한 식량 수송이 지연되면서 레닌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하는 것처럼 보이자 제르진스키가 나섰다.

체카 수장 외에 철도통제위원으로도 임명된 그는 부임 첫날 한 철도역을 시찰했다. 관계자들을 모두 참석시킨 가운데 열린 회의를 통해 두 사람이 이 사태의 책임이 있다는 보고를 받자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을 사살해버렸다. 이로써 전국에서 수송 지연 보고는 더는 들어오지 않았다.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이다

◇ 역사의 뒤편으로…세계 최대 비밀경찰 초석 마련

암살 기도 사건의 후유증과 누적된 피로 그리고 폐 질환 등 병마로 레닌은 1924년 1월 53세를 일기로 숨졌다. 제르진스키에게 레닌의 사망은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레닌의 사망과 함께 찾아온 권력투쟁의 와중에서도 제르진스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을 최고 지도자로 지지했다. 레닌처럼 스탈린에게도 제르진스키는 창과 방패 역할을 수행하는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1926년 7월 20일 소집된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제르진스키는 2시간에 걸친 연설에서 스탈린에 대항해 분파(통합반대파)를 결성한 레프 트로츠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등 세 사람을 맹렬히 비난했다. 연설 직후 그는 심장마비 증세를 보여 숨졌다.

사망 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수호기사"라고 칭송했다. 루뱐카 거리 주위는 그의 이름을 따서 '제르진스키 광장'으로 개칭됐다.

소련 붕괴 직전까지 모스크바 KGB 본부 건물 앞에 서 있던 제르진스키 동상[위키피디아 제공]

스탈린 사후에도 그에 대한 소련 당국의 정성은 지극했다. 1958년에는 KGB 본부 부근에 거대한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심지어 소련 내 폴란드 자치구 두 곳 가운데 하나를 그의 이름을 따 부르게 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로 추모의 열기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불발 쿠데타 직후인 1991년 8월 그의 동상은 철거돼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소련 정보·보안기관에 끼친 제르진스키의 영향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체카는 1923년 국가정치부(OGPU)로 바뀌었다. 비밀경찰의 기능은 물론이고 자체적인 군대까지 거느린 방대한 권력 기구로 탈바꿈했다.

OGPU는 다시 1934년 내무인민위원회 산하(NKVD)로 흡수돼 스탈린이 주도한 대대적인 숙청의 선봉장으로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처형 또는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에 추방하는 악역을 담당했다.

이후 1954년에는 10개 부서와 국경경비대를 관장하는 첩보ㆍ방첩기관으로 확대됐다. KGB는 1991년 해체됐다. 그러다 다시 보안업무를 담당하는 연방보안국(FSB)과 첩보공작을 관장하는 해외정보국(SVR) 등으로 분리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 기관 모두 제르진스키를 창시자로 여전히 신처럼 받든다는 사실이다.

<참고문헌>

*Christopher Andrew, KGB: The Inside Story of Its Foreign Operations from Lenin to Gorbachev(1990)

*Christopher Andrew, The Sword And The Shield: The Mitrokhin Archive And The Secret History of The KGB(1999)

*Ernest Volkmannn, Spies: The Secret Agents Who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1994)

*Jeffrey Richelson, A Century of Spies(1997)

(서울=연합뉴스) 김선한 기자

연합뉴스  sh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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