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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열전 14] "나치 석유산업을 마비시켜라"…에릭 에릭슨(下)

◇ 에릭슨의 '공작관' 스타인하트… "나치 석유산업 초토화하자"

에릭슨을 설득해 위험한 비밀공작에 끌어들인 인물은 소련 주재 미국 대사인 로런스 스타인하트였다. 독일계 유대인 출신인 스타인하트 역시 에릭슨처럼 성공한 석유사업가였다.

스타인하트는 1932년 대통령선거 당시 민주당 후보로 나선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도운 덕택에 스웨덴 주재 미 대사관 공사를 시작으로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스타인하트는 소련 주재 대사로 승진했다.

에릭 에릭슨을 나치 독일을 대상으로 한 스파이로 포섭한 로런스 스타인하트 소련 주재 미국 대사[위키피디아 제공]

스타인하트는 스웨덴 주재 공사로 근무할 때부터 에릭슨과의 절친한 사이였다. 모스크바로 부임 직전 그는 에릭슨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 전쟁이 상당 부분 석유 문제로 판가름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투기, 함정, 탱크 등 무기는 물론이고 이를 생산하는 산업을 유지하려면 충분하고 안정적인 석유 확보가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화가 무르익어가자 스타인하트는 대담한 제안을 내놓았다. 나치 추종자로 위장해 독일의 환심을 산 후 석유 산업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이를 통해 독일 석유산업 현황을 자연스럽게 파악해 앞으로 사태에 대비하자는 설명이었다.

미국 정부가 특히 관심이 많은 것은 합성유 부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이 부분에서 선구자였다. 전쟁이 터져 해외로부터의 석유 도입이 중단되더라도 석탄을 이용해 휘발유와 디젤 등의 석유를 생산하는 이 기술에 미국과 영국이 비상한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

미국은 독일의 합성유 생산 기술 수준과 생산공장 위치에 대한 정보가 절실했다. 그러나 독일도 이와 관련한 보안에 철저했다. 이에 따라 기초적인 첩보 외에는 수준 높은 정보 입수가 사실상 어려웠다.

스타인하트는 나치의 환심을 얻은 에릭슨이 합성유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비밀공작에 적격자라는 판단에 접근했다. 도덕심과 애국심에 호소하는 스타인하트의 제안을 에릭슨은 거절할 수 없었다.

에릭슨이 열렬한 나치 추종자로 변신한 것 같은 행동을 한 것도 결국 이런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 베를린을 제집처럼 왕래… 게슈타포 총책 힘러와 절친이 된 에릭슨

스웨덴 주재 SD 총책의 약속은 거짓이 아니었다. 독일 베를린으로 에릭슨을 불러들인 그는 히틀러 정권 실력자 헤르만 괴링을 소개했다. 괴링은 에릭슨을 다시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힘러에게 소개했다. 기밀인 합성유 사업 분야는 사실상 힘러의 소관이었다.

힘러와의 만남에서 에릭슨은 큰 인상을 남겼다. 에릭슨은 스웨덴에 나치 정권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합성유 생산시설을 건설하자는 예상치 못했던 제안을 했다. 만약 독일 내 공장이 파괴된다고 해도 스웨덴 내 공장에서 합성유 생산이 가능하다며, 이를 위해 스웨덴 당국에 대한 설득작업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슈바인푸르트를 폭격하는 미 공군 B-17 폭격기 편대[위키피디아 제공]

에릭슨의 이런 제의에 힘러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뻤다. 안정적인 합성유 생산시설 확보라는 숙제를 풀 수 있게 됐다는 판단에서였다. 더구나 독일 출장 때마다 동행한 스웨덴인은 다름 아닌 스웨덴 국왕의 조카인 카를 베르나도테였다. 베르나도테는 영향력이 상당했다.

에릭슨과 힘러는 이내 가까워졌다. 힘러의 도움으로 에릭슨은 독일 내 석유 생산시설을 수시로 둘러볼 수 있었다. 스웨덴에 합성유 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기술 습득을 하려면 광범위한 견학이 필요하다는 에릭슨의 요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참전으로 전쟁이 확대된 1943년까지 에릭슨은 독일 내 합성유 공장을 포함해 석유 생산시설 정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했다. 전달된 정보 가운데에는 관련 시설의 정확한 위치도 물론 포함됐다.

위치 정보(좌표)를 건네받은 미군과 영국군은 관련 시설에 대한 융단폭격에 나섰다. 마치 정밀지도로 폭격한 듯 정확했다. 어렵게 재가동을 해도 이내 다시 폭격으로 초토화했다.

그러나 나치는 이런 폭격이 설마 에릭슨의 '작품'에 의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워낙 우호적인 데다 스웨덴 정부를 상대로 설득작업에도 열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의심은 갔지만, 이를 입증할 확실한 물증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연합군의 집중폭격으로 석유 생산이 급감하자 에릭슨에 대한 독일의 의존도는 오히려 커졌다. 하루가 멀다고 스웨덴 내 생산시설 건설 공사를 서둘라는 압력이 가중됐다. 그러나 그는 스웨덴 정부의 이중 태도 등을 핑계로 사업 진행을 지연시켰다.

◇ 나치 패배를 앞당긴 석유 고갈 공작…최초 제트 전투기 운반도 소 떼로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독일의 합성유 생산은 바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전투기, 탱크 등 주요 장비의 가동이 급감했다.

연료 부족으로 비행하지 못한 채 격납고에 그대로 보관되는 전투기와 폭격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한때 유럽 전역을 휩쓸던 최정예 기갑부대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결국, 같은 해 말이 되자 합성유산업은 완전히 붕괴했다.

독일이 야심작으로 제작한 최초의 제트 전투기 ME262도 연료 부족으로 소 떼에 끌려 비행장으로 운반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막바지 제작한 세계 최초 제트전투기 ME262. 그러나 연료 부족으로 이 전투기는 앉은뱅이 신세가 됐다[위키피디아 제공]

합성유산업이 붕괴하자 에릭슨의 독일 출장도 중단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폭격할 석유생산시설이 독일 내에 더는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ME262 전투기 촌극이 벌어질 동안 에릭슨은 스톡홀름에서 미국인 친구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는 그는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이 나치 추종자로 돌변했던 것은 '국가 시책'에 따른 연극이라는 설명과 함께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에서 한 가지 사실은 실토했다. 나치와의 거래에서 상당한 이익을 거뒀다는 사실이었다.

◇ "전쟁을 2년 앞당겨 끝낸 인물"…아이젠하워의 찬사

전쟁이 끝나자 에릭슨은 본연의 사업에 복귀했다. 전쟁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전쟁을 최소한 2년 앞당겨 끝낸 인물"이라고 에릭슨에 대한 찬사를 잊지 않았다.

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에 초청해 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이런 찬사와 훈장 수상에도 에릭슨은 자신이 벌인 공작 활동에 대해 거의 함구했다. 다만 작가 클라인이 '위장 반역자'를 펴내고, 윌리엄 홀든이 주연한 같은 제목의 영화가 제작되는 과정에서 일부 사실을 인정했을 뿐이다.

에릭슨이 사망한 지 3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행적 진위를 둘러싸고 온갖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애국심보다는 미국 정부와 가족의 압력에 굴복해 어쩔 수 없이 비밀공작에 뛰어들었다는 것에서부터 순전히 돈벌이 목적으로 모험을 즐겼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그가 나치 독일의 석유산업을 파괴해 종전을 앞당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 관한 한 이견이 없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Ernest Volkmannn, Spies: The Secret Agents Who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1994)

*Jeffrey Richelson, A Century of Spies(1997)

*Stephan Tally, The Secret Agent: In Search of America's Greatest World War II Spy(2014)

 

연합뉴스  sh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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