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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열전 13] 'CIA의 아버지,' 윌리엄 도너번(下)

1942년 6월 발족한 OSS는 영국의 도움으로 먼저 조직 구성작업에 착수했다. 조직은 크게 적지에서 정보 수집과 파괴ㆍ교란 활동을 하는 공작처와 수집된 정보를 분석하고 새로운 임무를 고안하는 정보처로 이원화됐다.

이 가운데 OSS의 성가를 높인 것은 단연 공작 부문이었다. 공작처 아래로는 특수공작부, 심리전부, 해상 공작부, 특수임무부, 현장시험부, 작전지휘단 등이 있었다.

조직 구성 작업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것이 요원에 대한 훈련이었다. 특히 적국인 독일과 일본 깊숙이 잠입해 정보 수집과 파괴. 교란 활동을 하는 공작 요원을 발굴해 체계적인 훈련 과정을 거치게 하기는 쉽지 않은 과제였다.

호찌민과 응웬잡 장군(가운데 넥타이 맨 남자)이 이끄는 베트남 게릴라 조직을 지도하는 OSS 요원들[위키피디아 제공]

공작원들은 대부분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러시아어 등에 능통한 이민자들이나 관련국 출신 유학생들로 채워졌다. 훈련 과정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역시 영국이었다. 훈련 과정을 거친 공작 요원들은 신분을 위장한 채 적국에 잠입해 목숨을 건 공작을 수행했다.

OSS에 채용된 요원은 한때 2만4천여 명이나 될 정도로 영향력을 형성했다. OSS는 영국의 전시 공작기구인 특수공작처(SOE)와 연계해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서 레지스탕스를 포함한 반독(反獨) 저항조직 등과 연계한 공작(제드버그 공작)을 전개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 'D-데이' 상륙 예상지와 V-2 로켓 기밀을 빼내라…호찌민을 구하라

나치 독일에 맞서 OSS가 수행한 성공적인 비밀공작 가운데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 바로 독일 외교관 프리츠 콜베를 통한 공작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8월부터 거의 1년 넘게 진행된 이 공작의 숨은 영웅은 바로 스위스 지부장인 앨런 W 덜레스다.

훗날 5대(1953∼1961년) CIA 국장으로 재직한 덜레스는 나치에 반감을 품은 콜베를 포섭해 1천600건가량의 기밀 정보를 빼내는 데 성공했다. 이 가운데에는 프랑스 탈환을 위한 연합군의 예상 상륙지, 영국 런던 시민을 공포에 휩싸이게 한 최초의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인 V-1, V-2 로켓, 독일 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메서슈미트 Me 262, 동남아에 대한 일본의 군사 계획 정보 등 전세를 역전시킨 중요한 정보들도 포함됐다.

독일의 V-2 로켓 발사 광경[위키피디아 제공]

덜레스는 또 나치 학정을 피해 망명한 공산주의자, 유대인 등 독일인들을 상당수 포섭해 정보수집 활동에서부터 기만과 테러 등 다양한 공작을 지휘했다.

OSS의 무용은 유럽 전선에서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일본 점령권인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도 다양한 공작을 성공적으로 전개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부터 1945년 종전 때까지 OSS는 중국, 버마(미얀마), 베트남 등에서 반일(反日) 무장조직들에 대한 화기와 군사 기술 지원 등을 통해 우호 관계를 형성, 파괴와 적 주요 인사 암살 등 여러 공작을 수행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 사례가 바로 베트남 공작이었다. 베트남에서는 당시 호찌민, 보응웬잡, 팜반동 등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독립동맹회'(베트민)가 점령군인 일본군과 친일 식민군을 상대로 북부 중국 접경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베트민 지도자 호찌민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면 미국의 도움이 절대적이라는 판단 아래 중국 쿤밍(昆明)에 본부를 둔 OSS 지부와 접촉을 시도했다.

OSS는 이런 접촉 시도를 좌시하지 않았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조직적인 반일 게릴라 조직은 베트민이 유일했다. 결국, 공동의 적인 일본을 물리치려면 협력이 절실하다는 판단을 내린 양측은 손을 잡았다. 이에 따라 OSS 중국 지부는 총기와 탄약 등 물자와 앨리슨 토머스 육군 소령을 지휘관으로 하는 공작· 훈련 지원팀(Deer Team)을 파견해 군사 훈련을 전수했다.

이 과정에서 호찌민은 말라리아에 걸려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러나 OSS 지원팀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결국, 미국에 가장 큰 패배를 안겨준 베트남전을 승리로 견인한 동력 중의 하나인 호찌민의 목숨을 구한 것이 OSS라는 사실은 역설적이기도 하다.

◇ 도너번의 숙적, 후버와 맥아더

OSS 수장으로 도너번이 부딪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에드거 후버 연방수사국(FBI)국장과 남태평양전선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었다. 효과적인 공작을 위해서는 중남미 지역도 필수불가결했다.

특히 독일이 전쟁 발발 전부터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등을 거점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상황에서 OSS로서는 중남미에 터전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후버는 중남미가 FBI의 고유 활동무대라며 OSS의 중남미 진출 시도에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OSS는 중남미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맥아더의 방해도 만만치 않았다. OSS 요원들은 필리핀에서 활동을 아예 금지당했다. 전쟁 발발 전까지 사실상 필리핀 '총독'이나 마찬가지였던 맥아더로서는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는 OSS가 활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제약에도 OSS는 첩보 기관으로, 비밀공작기구로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 루스벨트의 서거와 잇따른 시련 …OSS 해체

유럽과 아시아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둔 OSS의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45년 4월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거했다. 하루아침에 든든한 후견인을 잃은 도너번에게 시련은 기다렸다는 듯이 들이닥쳤다.

루스벨트를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 해리 트루먼은 후버 만큼 도너번도 싫어했다. 화려한 배경을 가진 루스벨트와 도너번과 달리 내놓을 것 없는 트루먼의 자격지심은 이내 반감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트루먼은 OSS 존속을 원하는 도너번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군 최고 수뇌부로부터 태평양전쟁 브리핑을 받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 맨 왼쪽은 더글러스 맥아더 남태평양전선 사령관[위키피디아 제공]

이 과정에서 도너번과 OSS를 라이벌로 인식해온 후버의 입김도 한 몫 했다. 보수성향의 논객들도 OSS를 "미국의 게슈타포"라며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도너번의 갖은 노력에도 OSS는 트루먼의 지시로 같은 해(1945년) 9월 해체됐다.

해체와 함께 도너번도 평범한 시민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평시에도 OSS처럼 새로운 통합 정보기관이 필요하고 특히 이 기관은 비밀공작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아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했다. 결국, 그의 이런 권고는 1947년 제정된 국가안보법과 1949년 CIA 발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너번은 잠시 나치 주요 전범 단죄를 위해 설립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의 주임검사 보좌관으로 일하다 이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태국 주재 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1959년 2월 워싱턴 DC의 월트 리드 육군병원에서 뇌혈관성 질환으로 79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참고문헌>

*Anthony Cave Brown, Wild Bill Donovan: The Last Hero(1982)

*Cecil Currey, Victory at Any Cost: The Genius of Viet Nam's Gen. Vo Nguyen Giap(1997) 

*Ernest Volkmannn, Spies: The Secret Agents Who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1994) 

*Jeffrey Richelson, A Century of Spies(1997) 

*Richard Dunlop, Donovan: America's Master Spy(2014)

(서울=연합뉴스) 김선한 기자

연합뉴스  sh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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