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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열전 13] 'CIA의 아버지,' 윌리엄 도너번(上)

"OSS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OSS를 창설한 사람이 바로 윌리엄 도너번 장군입니다. 장군은 미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영웅입니다. 그는 '미국 정보기관의 아버지,' '미국 특수전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이 때문에 중앙정보국(CIA)은 물론이고 특전(SOF)부대들도 그를 창설자로 기리고 있습니다."

미 플로리다 탬파 시 맥딜 공군기지 내에 있는 미 통합특수전사령부(SOCOM)를 방문했을 당시 SOCOM 공보관이 들려준 설명이다. 사령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온화한 표정의 동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질문에 공보관은 망설임 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는 SOCOM의 휘장도 2차 세계대전 당시 OSS 휘장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라며, CIA처럼 SOCOM도 OSS의 적자라고 덧붙였다.

미 중앙정보국(CIA)에 전시된 윌리엄 도너번 소장의 동상[위키피디아 제공]

우리에게도 OSS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전략사무국'으로 번역되는 OSS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 맞선 미국의 첩보. 특수공작기관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고인이 된 언론인 장준하 선생과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등 유명 인사들이 한국 독립에 필요한 게릴라 훈련 등을 받은 곳이 OSS이기 때문이다. CIA의 전신인 OSS의 산파 역을 담당한 도너번은 '와일드 빌'(Wild Bill)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세계 첩보 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축구선수에서 변호사로 다시 군인으로

윌리엄 조지프 도너번은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아들로 1883년 뉴욕주 버펄로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부모의 권유에 따라 그는 뉴욕주 나이아가라 대학에 입학한 뒤 곧 컬럼비아대학으로 전학했다.

컬럼비아대학에서 도너번은 미식축구팀에서 맹활약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질주하는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바로 '와일드 빌'(Wild Bill)이었다. 이 별명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남학생 사교 모임인 '파이 카파 사이'(Phi Kappa Psi)의 회원이었던 그는 컬럼비아 로스쿨을 마치고 곧장 뉴욕 맨해튼을 무대로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안정된 변호사 생활에 싫증을 느끼자 그는 뉴욕주 방위군 산하 기병중대를 창설해 중대장에 올랐다.

기병중대 중대장이 된 지 4년 만인 1916년 도너번은 멕시코 혁명군 지도자로 미국 접경 뉴멕시코주를 습격한 판초 비야 추적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전선에서 전공을 세운 윌리엄 도너번을 '이달의 자랑스러운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기리는 포스터[위키피디아 제공]

이듬해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도너번은 소령 진급과 함께 제42 보병사단 165연대 1대대장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가 지휘한 대대는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발족한 부대로 프랑스의 생 조르주 전선에서 무훈을 세웠다. 이 공로로 도너번은 최고 무공훈장인 의회영예장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대령으로 고속 진급한 그는 포성이 멎자 다시 민간인 신분으로 복귀했다. 혁혁한 전과로 이미 명성을 얻기 시작한 도너번은 뉴욕주 서부 지역 담당 연방검사로 임명됐다. 연방검사로서 가장 정열을 쏟아부은 것이 바로 금주령 위반자 색출과 검거였다.

이 과정에서 밀주 밀매단 등으로부터 자택 폭파 위협 등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법 집행에 매진했다. 도너번의 이런 자세는 언론과 정치권의 비상한 관심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1922년 공화당 공천으로 뉴욕주 부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1924년 같은 공화당 출신인 앨빈 쿨리지 대통령은 도너번을 해리 도허티 법무장관의 보좌관으로 임명, 독과점 업무를 맡겼다. 이런 상황에서도 도너번은 정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1932년 그는 뉴욕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와 독대…대통령 밀사로 유럽서 첩보 활동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직전까지 도너번은 여러 차례 유럽 여행에 나섰다. 그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독재자인 베니토 무솔리니 등 다양한 유럽 고위층과 독대하면서 대화의 기회를 가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전쟁 발발이 불가피하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귀국해서 정계와 재계 등 각계각층의 주요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전쟁이 시간 문제라고 역설했다. 이런 언행은 당연히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도너번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인 대표적인 유력인사가 바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루스벨트는 민주당원으로 도너번과 소속정당은 달랐지만, 개인 성향에서는 비슷했다. 루스벨트는 무엇보다 도너번의 통찰력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1939년 9월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루스벨트도 미국의 참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런 루스벨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바로 프랭크 녹스 해군 장관이었다. 언론인 출신으로 도너번과 친구인 녹스는 루스벨트에게 그를 천거했다. 평소에도 관심이 많던 터라 루스벨트는 도너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루스벨트가 처음 제시한 직책은 대통령의 개인 특사였다. 이 자격으로 도너번은 1940년부터 이듬해까지 독일의 파죽지세에 고군분투하던 영국을 방문했다.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은 영국이 독일의 침공에 버틸 수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방문 기간 도너번은 윈스턴 처칠 총리, 스튜어트 멘지스 비밀정보국(SIS/MI6) 국장을 포함한 영국 정보기관장 등과 잇따라 만나 의견을 청취했다.

도너번은 영국이 충분히 버틸 수 있으며, 영국을 본떠 정보 수집과 교란 등 각종 비밀공작 활동을 수행하는 정보기관 발족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루스벨트에게 제출했다.

◇ 순탄치 않은 정보조정관 역할과 OSS 발족

도너번이 제출한 보고서에 크게 고무된 루스벨트는 1941년 7월 그를 정보조정관(COI)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도너번의 첫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미국은 육군과 해군 정보국, 연방수사국(FBI), 국무부 등 여러 기관에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 정보기구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보 공유는 아예 기대하기 어려웠다.

전략사무국(OSS) 수장 시절의 윌리엄 도너번[위키피디아 제공]

정보조정관의 임무는 이해관계에 따라 산재한 각 기관 산하 정보조직의 관련 업무를 조정해 총괄하는 것이었다. 명목상 그럴듯하게 보이는 이 직책은 실제로는 제대로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각 기관의 알력다툼이 워낙 심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도너번은 중앙집중적인 정보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도너번은 1941년 10월 뉴욕 맨해튼의 록펠러센터 306호에 COI 뉴욕 본부를 설치하고 책임자로 변호사 후배로 절친한 앨런 덜레스를 앉혔다. COI 뉴욕 본부는 도너번과 절친한 영국 MI6의 윌리엄 스티븐스가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고 비밀공작을 수행하려고 설립한 영국안보보정 사무처(BSC) 바로 위층에 자리 잡았다.

당연히 두 기관은 다양한 정보를 공유했다. 특히 COI는 정보 수집과 비밀공작 분야에서는 최고인 MI6로부터 다양한 기술을 전수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일어난 직후인 1942년 COI는 OSS로 이름을 바꾸었다. 개칭과 함께 도너번도 미 육군 대령 계급으로 현역에 복귀했다. 이제 본격적인 미국의 무대가 펼쳐진 셈이었다.

(서울=연합뉴스) 김선한 기자

연합뉴스  sh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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