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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멸망과 유대인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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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멸망과 유대인의 귀환

성경에 따르면 에스겔이 환상을 보는 내용이 나온다(겔37:1-14). 에스겔을 인도한 하나님의 신이 골짜기에 흩어진 수많은 뼈들이 결합되어 살아나는 장면을 보여준 것이다. 에스겔은 이를 이스라엘의 부활에 대한 징조로 받아 들였다. 에스겔이 해석하기로 이 마른 뼈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했다.

이때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고레스(키루스 2세) 왕이 칙령으로 유대인의 귀한을 허용했다. 유대인들은 에스겔의 환상이 실현되었다고 믿었다.

오리엔트 역사상 가장 컸던 페르시아 제국은 처음부터 바빌로니아와는 아주 다른 정책을 폈다. 고레스 왕은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에 ‘고레스 원통’이라는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문서가 1879년에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바벨론 거주민에 대해는 .... 나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안 주는 것과 사회적 신분을 안주는 제도를 폐지한다 ... 나는 그들의 무질서한 주거 생활에 안녕을 주었고 티그리스 다른 편에 있는 헌납됐던 도시들을 돌려주었다. 그 땅은 오랫동안 폐허였던 거룩한 땅으로 ... 나는 역시 이전의 원주민들을 모아서 그리로 돌려보냈다.”

즉 모든 시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질 수 있으며, 노예제도를 금지하며, 궁궐을 짓는 모든 일꾼에게 급여를 지급한다고 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파격이었다.

통치기간 동안 고레스 왕은 다민족 국가인 페르시아 제국의 융화를 위해 종교적 관용 정책을 표방했다. 그는 피정복민에게서 조차 기꺼이 배우는 자세를 취했다. 정부 형태와 통치 방식에서도 다른 민족의 것을 차용해 그것을 새로운 제국에 맞게 응용했다. 이것이 그의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까지 전해져 페르시아 제국의 문화와 문명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페르시아의 바빌로니아 정복 후 맨 먼저 고레스 왕이 한 일은 여러 민족들을 모두 석방하는 일이었다. 유대 민족에게도 자율권을 부여했다. 기원전 538년, 고래스 왕의 포고를 통해 유대인의 귀향이 허용되었다. 이른바 ‘고레스 칙령‘이다. 황폐한 유다왕국의 영토를 방치하는 것보다는 유대인들이 돌아가서 땅을 개간하고 예루살렘을 재건해 페르시아에 조공을 바치는 것이 더 실리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고레스 칙령은 꿈같은 소식이었다. 고레스 왕은 유대인들에 해방자로 추앙받았다.

유대 민족이 바빌로니아로부터 풀려날 때까지의 약 50년 역사(바벨론 유수기라고 부른다) 는 기원전 586~538년 사이다. 당시 바벨론에 살던 유대인 15만 명 가운데 1차로 4만여 명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귀환한 이들은 세 번의 전쟁 폐허에서도 어렵게 살아남은 현지의 유대인들과 합류해 함께 살게 되었다. 이들을 이끈 첫 번째 유대 총독은 예전의 왕 여호야긴의 아들 셰나자르였다. 무역상으로 성공한 잔류 유대인들은 돈을 모아서 귀환하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정착 경비를 지원했다. 이른바 시오니즘의 시작이다.

*시오니즘(Zionism) : <역사> 유대인들의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주의(민족해방) 운동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그들 조상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 19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함으로 실현되었다.

비슷한 말. 시온운동, 시온주의, 유대주의, 유태주의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바빌로니아가 약탈했던 성전의 온갖 제기들도 갖고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고레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귀환자들이 성전 재건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고향에 남아 있던 가난한 유대인들이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한 땅의 백성이라 불렀는데 이들의 경제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그들은 사마리아인, 에돔인, 아람인과 힘을 합쳐 귀환자들이 성벽 쌓는 일을 방해했다. 이렇게 저항이 만만치 않은데다 귀향자들도 너무 곤궁해 생계도 어려웠다. 이로써 성전 재건은 1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2차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고레스 왕 이후 페르시아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아 기원전 520년에 2차 귀환이 있었다. 인솔자 스룹바벨은 다윗의 자손으로 페르시아의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성경>에 의하면 4만 2,360명의 포로들이 그와 함께 귀환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수많은 사제와 서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예루살렘에서는 새로운 유대교 정통파가 출현한다. 신전 재건 사업이 시작되었다. 새 신전은 비록 레바논 삼나무가 다시 사용되기는 했지만 솔로몬 왕 때 지어진 신전보다는 훨씬 수수한 양식으로 지어졌다 혼혈인 사마리아인은 이단으로 간주되어 재건공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마침내 기원전 515년에 성전 봉헌식을 올렸다. 성전 소멸로부터 꼭 70년 되던 해였다. 솔로몬 왕의 첫 성전에 이은 두 번째 성전이었다. 이 시기부터 유다 왕국은 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행정 자치령의 나라가 된다.

유대인들은 고레스 왕을 메시아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가 유대 민족을 바빌로니아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었고,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까지 재건하도록 지원을 했으며, 종교적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메시아로 인식됐던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신봉하던 종교가 바로 ‘조로아스터교’였다 이후 유대인들은 자연히 조로아스터교의 메시아 사상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사상은 조로아스터가 죽은 후 3천 년이 지나면 유일신이 지상에 강림해서 최후 심판기가 오고 그때 모든 인간은 부활하며 심판이 행해진 후 영생복락의 메시아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바벨론 유대인들은 네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로 돌아왔는데, 기원전 444년 총독으로 임명받은 느헤미야와 기원전 428년 종교 지도자 에스라에 의해 3차, 4차 귀환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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